• 2023. 5. 6.

    by. 음악의자유

    레게의 대표적인 나라 자메이카 그곳은 쿠바 밑에 있는 작은 섬나라입니다.
    인구는 300만 명 정도 하지만 이렇게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스포츠 선수와 음악가들을 배출해 왔는데
    대표적으로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올림픽 육상 경기에서 보던 총알처럼 빠른 사나이 우사인볼트와
    음악가로는 평화의 상징 밥 말 리가 있습니다.

     

    레게 음악의 탄생 배경

    카리브해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자메이카. 인구의 90% 이상이 아프리카계입니다.
    그 이유는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뼈 아픈 역사 중 하나인 흑인 노예무역 때문인데요, 이 노예무역이 자메이카와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자메이카는 누구나 알고 있는 대륙 탐험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직접 탐방을 한 섬입니다.

    그리고 그의 발견을 뒤이어 수많은 스페인 인들이 자메이카에 정착하기 시작하며 많은 사람들이 항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메이카 사람들에게 전염병을 옮기면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자메이카 원주민들은 Arawak이라 불렸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스페인 인들의 노예로 전락하여 노예 생활을 하다가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Arawak 원주민들이 죽자 노동력이 필요했던 스페인 사람들은 서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자메이카까지 끌고 오게 되었는데 그 부족들이 바로 Ashanti 부족들입니다.
    Ashanti 부족들은 토속 신앙을 가졌는데 그 토속 신앙 중 유명한 토속악령이 바로 DUPPY라고 하는 귀신입니다.
    DUPPY의 장난을 막기 위해선 당시 Obeah라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굿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 굿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Obeah라는 굿은 굉장히 리드미컬한 춤과 노래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원주민들은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들을 사용하여(코코넛, 대나무 등과 같은) 여러 가지 타 악기를 만들어 그 리듬과 음악을 계승해 나갔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굿은 점점 음악으로 발전해 나갔고 이렇게 수많은 지역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자신들의 아프리카 전통음악을 공유하면서 자메이카 레게음악의 탄생 배경이 되었습니다.

     

    레게 음악의 발전

    자메이카의 대중문화는 1950년대 발전하였고 세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노동력이 부족했던 영국은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자메이카 사람들을 영국으로 불러와 싼값에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자메이카와 미국이 가까우니 자메이카 사람들을 불러와 미국에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때 미국에 갔던 자메이카 이주 노동자들이 미국에 가서 당시 흑인들의 주류 음악인 R&B 음악 코드를 대거 들여왔습니다.

    그 당시 미국에서 Radio Jamaica Rediffusion(RJR)이 생기면서 아프리카 전통 음악에 젖어 살았던 영국의 락과 미국의 알앤비에 노출이 되면서 그 혼합이 SKA라고 하는 자메이카만의 독특한 리듬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SKA음악이 이제 자메이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고, 미국이나 영국으로 갔던 자메이카인들이 고향이 그리워 SKA앨범을 사서 듣게 되었고, SKA음악을 하면 바(Bar)나 클럽에서 노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시발점으로 자메이카에 리코딩 스튜디오가 생기고 수많은 청년들이 스튜디오 앞에서 자기 노래를 들어달라고 줄을 섰는데 그중 한 팀이 밥 말리와 그의 친구들로 구성된 그룹 The Wailers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밥 말 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위대한 오늘날의 아티스트로 존경받는 것은 제3세계 특히 유색인종의 핍박을 그대로 음악에 녹여냈기 때문인데, 그가 이런 음악을 만들게 된 계기는 (1930년대 자메이카에서 시작된 신흥 종교)에 가입하면서부터입니다.

    평화의 상징 밥 말리

    밥 말리는 1945년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밥 말리는 영국군 출신 백인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혼혈의 정체성으로 혼란을 겪으며 유년기/청소년기를 보냅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그의 피부색은 당시 흑인 중심의 사회를 이루고 있던 자메이카에서 콤플렉스로 그를 짓눌렀습니다.

     

    밥 말리는 외할아버지 손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외할아버지는 Obeah 주술로 마을에서 유명하며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밥 말리도 이 Obeah 주술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게 어느 정도냐면 그의 노래에 "DUPPY CONQUEROR"라는 노래가 있는데 즉, 악령을 정복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노래입니다.

    즉 그는 자기가 하는 음악이 악한 악령들을 내쫓아주는 그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밥 말리의 음악

    밥 말리는 16살에 정식으로 앨범을 냈습니다. 자메이카 토속 음악의 영향을 받았기에, 팀 웨일러스(Wailers) 밴드를 만들어서 레게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레게 음악은 흑인 음악에 뿌리를 두고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던 장르입니다.

     

    밥 말리는 가수 활동을 시작하며 "Judge Not"을 발표하고, 1966년 리타 앤더슨과 결혼했습니다. 그 후 "Catch a Fire"를 발표하는데, 이것은 "Stir It Up" "Stop That Train"로 대박을 터트리며 레게 음악의 명앨범으로 꼽힙니다.

     

    그 후 팀을 탈퇴하고 1974년 I-Threes를 만들어서 "Natty Dread"를 발표했습니다. 이 앨범엔 "No Woman, No Cry" "Lively Up Yourself"라는 레게 최고 인기곡이 담깁니다. 그 후 "Rastaman Vibrations", "Exodus" 등의 음악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됩니다.

     

    하지만 흑색종이 발견되며 그의 인생은 짧은 한 획으로 끝나게 됩니다. 암 치료를 거부한 채 세계 투어를 하던 그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1981년 온몸에 암이 퍼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밥 말 리가 사망하자 전 세계는 슬픔에 빠졌었습니다.

     

    밥 말리의 죽음

    그의 암은 아주 사소한 일로 발견되었습니다. 평소에 축구를 매우 좋아했기에 프랑스 기자들과 축구를 했었는데, 그러다가 발을 밟혔습니다. 그래서 치료하다가 암세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아골 흑색종은 당시 불치암이었습니다.

     

    당시 의학 기술로는 치료할 수 없는 이 병은 그의 뇌와 폐, 그리고 심장까지 퍼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동은 계속되었고, 결국 36살의 나이로 암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허무한 죽음이었기에 아직도 그의 죽음을 믿지 않는 팬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한 남자에 대한 기사로 세계가 또 한 번 들끓었습니다. 한 인터넷 언론에서 "CIA 요원 고해성사: 나는 밥 말리를 죽였다"는 기사를 쓴 것입니다. 밥 말리의 암살범은 옥슬리라는 CIA 요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밥 말리 암살 음모론

    Oxley(빌 옥슬리)는 죽기 얼마 전, 자신이 CIA로 활동하던 시기의 암살 등에 대해 고백했다고 합니다. 당시 CIA 퇴직 요원이었던 그는 79세가 되는 해에 자신이 밥 말리의 암살범이라고 고백했다는 내용으로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는 1974년부터 85년 사이에 17건의 암살을 했다고 고백했는데, 그중에 밥 말리도 있었습니다. 말리의 레게 음악은 정치적 성향이 강해서 CIA와 충돌이 컸다고 합니다. 빌 옥슬리는 그에게 방사능 또는 독살 특수 물질을 주입해서 죽였다고 했습니다. [저작권

    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

    과거에 밥 말 리가 옥슬리의 아들인 사진작가와 사진 촬영이 있었는데, 이때 신발을 선물하며 안쪽에 뾰족한 금속 물질을 설치했었다고 합니다. 이는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 이외는 어떤 추가 증거나 교차 인증 자료가 없기에, 그저 음모론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